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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한 최초의 농학박사 계응상
구분 동향자료 저자
발간기관 북한과학기술네트워크 발간일 2016-11-21
원문링크 http://www.nktech.net/inform/nkt_briefing/nkt_briefing_v.jsp?record_no=8
북한 잠학분야의 개척자인 계응상(1891-1967)은 북한 최고의 유전학자이자, 양잠생산자로 유명하다. 계응상은 리센코주의가 득세할 당시 리센코주의의 추종자들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고전유전학에 기반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였다. 또한 새로운 종류의 누에 육성에 성공함으로써 북한이 누에를 자급자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47년「집누에의 유전에 관한 연구」로 북한 최초로 농학박사를 수여 받았고, 멧누에와 곤마천의 육성 기술 확립의 공로로 「인민상」과「노력영웅」을 수여 했다. 그리고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는 등 북한 과학계에서 최정상급 대접을 받았다. 1991년에는 이러한 계응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리원농업대학을 계응상대학으로 개칭하였고, 그의 생애를 그린 소설『어느 탐구자의 생애』는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리센코 학설과의 대결 계응상이 북한에서 가장 유명한 유전학자로 활동하던 1940년대는 소련의 농학자 리센코가 서구의 고전유전학을 완강히 부정하고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이른바, ‘리센코 학설’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였다. 고전유전학자와 리센코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유전학상의 논쟁은 과학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권력투쟁의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학의 모방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리센코주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1949년 초가을, 당에서 파견한 교육관료들이 계응상이 강의하던 고전유전학을 반동학설로 여겨 고전유전학 강의를 폐강시키고, 그를 원산농업대학 잠학부장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계응상은 고전유전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김일성은 과학적 논쟁은 어디까지나 인식적 견지에서 행해져야만 한다는 이유를 들어 계응상을 복직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후 계응상은 과학원 창설 때, 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됨으로써 그의 지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새로운 누에의 육성 계응상의 주요 연구는 유전학을 이용해 북한의 기후풍토에 맞는 생산량이 높은 누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곤마천을 개량하여 육성한 것이었다. 곤마천은 보통의 누에처럼 뽕잎을 먹지 않고 곤마를 먹는데, 곤마는 1년 생으로 열매에서는 기름을 얻을 수 있고, 줄기는 섬유의 원료가 된다. 이렇게 경제적이고 우수한 품종인 곤마천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田中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했고, 총독부도 조선에서 그것을 육성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었다. 이런 곤마천을 계응상은 오랜 연구 끝에 조선 토착 누에와 종간교배에 의해 개량을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곤마천의 육성에 성공한 계응상은 또 다시 북한의 풍토에 맞춘 천잠(산누에)의 개량을 시도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1967년 4월 25일 타계하였다.